목수 일 하던 '물리 천재'…창업으로 세상을 바꾸는 꿈 꾼다 [긱스]

입력 2022-08-05 10:25   수정 2022-08-06 11:06

이 기사는 프리미엄 스타트업 미디어 플랫폼 한경 긱스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수학 천재, 물리 천재. 중학교 3학년 때 한국 올림피아드에 나가 물리 과목 전국 1위에 오르기도 했던 이 청년은 서울과학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합니다. 이후 해병대 생활을 마치고, 돌연 베트남으로 떠나 호찌민 인근 공장에서 단순 노동을 합니다. '날것 그대로의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서'였다고 말합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목공소에서 목수 일도 배웠습니다. 치열한 고민의 시간을 거듭하던 그는 대학에서 한 교수를 만난 뒤 '창업'에 눈 뜨게 됩니다. "창업으로 세상에 임팩트를 주자", "인류를 위한 서비스를 만들자"는 갈망에 지난해 친구 두 명과 함께 스타트업을 세웠다는 이현직 레브잇(올웨이즈) 공동창업자 이야기입니다. 윤춘호 에스비에스(SBS) 논설위원이 이 청년과 나눈 긴 이야기를 한경 긱스(Geeks) 독자들을 위해 전해왔습니다.

1. '물리'의 힘으로 과학고에 가다

지난해 스타트업을 시작한 20대 청년의 이야기다. 가진 것은 없어도 꿈과 열정만 있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 받은 것이 많으니 갚을 것도 많다고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 시대는 청년이 시퍼런 꿈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지원과 동정의 대상이다. 불안을 호소하는 청년은 많아도 책임감을 말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그런 세상에서 이 사람은 꿈을 말하고, 세상을 바꾸고 싶은 갈망에 대해 말한다. 창업한 지 9개월, 동종업계에서는 제법 화제가 되고 있다지만 이 사람 이름도, 이 사람 업체도 아직은 무명이다. 청년들에게 창업을 권하는 시대다. 창업은 나누어줄 일자리가 없으니 너희들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어 보라는 말로도 들리고, 성공보다는 실패의 확률이 높지만 재능과 열정이 있는 청년들에게는 인생을 걸어볼 만한 일인 것도 사실이다. 이 사람 역시 그런 청년 창업 대열에 서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을 통해 청년의 고민과 꿈, 스타트업 창업자의 보람과 어려움을 듣고 싶었다. 팀구매 플랫폼 '올웨이즈' 공동창업자 이현직을 만난 이유다.

수학 천재, 물리 천재였다. 중학교 전체 석차는 중간 정도였지만 두 과목만큼은 단연 탁월했다. 학원에서 물리 기본을 배우고 밤에는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교수의 물리 강의를 유튜브로 들었다. 해리 포터 비디오와 책으로 익힌 영어가 강의를 듣는 데 도움이 됐다. 중학교 3학년 때 한국 올림피아드에 나가 물리 과목 전국 1위를 차지했다. 그 성적에 힘입어 서울과학고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고교 진학하던 그해 입시부터 서울과학고가 서울영재고로 전환되면서 내신 반영 비율이 낮아진 덕도 봤다.

고1 때 한국 올림피아드에서 전국 10등 안에 들어 금상을 받았다. 5위 이내로 들어가는 데는 실패해서 국제올림피아드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는데 이 사람이 경험한 드문 실패 중 하나였다. 자신이 잘하는 과목을 자기 주도로 공부할 수 있는 학교에 들어갔으니 고교 시절은 '물 만난 고기'였다. 당시 서울과학고는 석차를 없애고 학생들의 창의성을 중시했다. 좋아하는 물리 공부 실컷 하고, 록 밴드 보컬로 활동했고, 아카펠라 동호회도 만들었다. 고3 때는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 당선됐다. 그러고도 너끈히 서울대 물리학과에 수시로 합격했다. 의대 가겠다는 친구들을 설득해서 물리학과에 함께 입학했다니 물리학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서울과학고 출신 가운데 의대 진학률이 꽤 높더군요. 대학에 갈 때 의대를 갈까 하는 생각은 안 했습니까.

“의사 일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재미가 있을 거 같지도 않았구요. 어린 마음에 아인슈타인이 만들어 이 세상에 준 어마어마한 임팩트와 의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임팩트랑 비교해봤을 때 의사가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어요.”

대학에 들어가면서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했다. 과외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살았다. 부모님은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성화였지만 이제 성인인데 왜 부모님의 지원을 받느냐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2. 공부’가 아니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학에 들어가니 교수가 칠판에 수식을 적어가면서 물리를 가르쳤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을 내는 방식에 익숙했던 이 사람에게 그런 주입식 강의 방식이 낯설었다. 이런 강의 방식을 바꾸자는 이 사람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신 ‘별종’이라는 별명만 얻었다. 물리학이 과연 실용적인 학문일까, 보다 실용적인 학문은 없을까 하는 고민에서 생명공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했다.

“물리를 하다가 이제 소위 '현타'라고 하죠. 물리가 그렇게 실용적이지 않은 거 같았어요, 적어도 내가 원하는 정도로 실용적이지는 않은 거 같았죠. 나중에 기초과학이 쌓이고 쌓이면 100년 뒤, 200년 뒤에는 실용적으로 될지 모르지만 뭔가 당장 실용적인 것에 관심이 가더라구요.”

생명과학도 복수전공을 했지만 그 분야 역시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더 실용적인 학문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기계공학 역시 복수전공으로 추가했다. 이런 연유로 학사 학위가 세 개다. 3학년 때 물리천문학부 학생회장이 됐다. 당시 학생회는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학생운동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학생 자치 활동에 힘을 쏟으면서 외부 인사를 초청해 특강을 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도 적지 않았다. 한껏 활개 치며 살았던 고교 시절에 비하면 대학 시절은 다소 답답한 모색의 시간이었다. '어떤 학문을, 어떤 방식으로 공부해야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의 연속이었다. 여전히 물리학을 좋아하고 물리에서 자신의 미래를 찾고 있었지만 가야 할 곳을 명확하게 설정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대학 3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다. 병역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유학을 갈 생각이었다. 생명공학부 실험실에서 만난 선배 중에 해병대 출신이 있었는데 듬직하고 멋있어 보였다. 해병대라는 이름이 주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더 컸다. 머리보다 몸을 먼저 써야 하는 곳에서 배우고 느낀 게 많았다. 해병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 사람이 이렇게 먹고, 이런 데서 자면서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형적인 중산층 집안에서 자란 청년에게는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살아온 결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해병대에서 만났다. 그 사람들이 슬기롭고 아름다웠다고 표현했다. 병영 문화를 소재로 한 동영상 콘테스트에 참가해 두 차례나 입상했다. 이 사람 활약 덕에 전체 중대원들이 4박 5일 포상 휴가를 다녀왔다.

-해병대가 남성성의 상징 같은 의미도 있지 않나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군대가 좋은 기회이지만 악습을 배우는 시간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거기에서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쁜 것을 배우려면 배울 수 있을 건데 그건 본인의 몫인 거 같아요. 거기에서 제일 좋았던 것은 해병대는 자원해서 온 사람들이고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이런 생각에 동의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 한몸이라는 일체감이 큰 만족감을 준 거 같아요.”

입대하기 전까지 공부가 전부였던 사람이다. 공부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는 방법이었고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칭찬을 받았고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옳게 사는 것인 양 평가받기도 했다. 군대는 이 사람 인생에서 처음으로 공부가 빠진, 공부가 없는 시절이었다. 공부의 빈자리를 ‘철학’이 채우기 시작했다.

“군대에서 제로베이스에서 제 인생을 생각해볼 계기가 됐던 거 같아요. 그때까지 공부 위주로 살아왔는데 공부가 꼭 정답은 아니겠다, 그런 생각들이 들었어요. 뭔가 이 세상에서 큰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데 왜 내가 큰일을 해야 하는가, 왜 내가 굳이 그래야 하는가, 뭐 이런 의문들이 있었던 거죠. 그렇게 생각하면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 거죠. 그러면 굳이 공부를 할 이유도 없는 거 아닌가, 나는 뭘 해야 되는가, 뭘 하는 게 맞는 건가 그런 고민들을 시작한 거죠.”

3. 베트남 공장에 이은 목공소 생활

군대에서 시작된 정신적 방황은 제대 이후 더 깊어졌다. 복학을 미루고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에서 베트남으로 떠났다.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리얼’을 경험하고 싶어 호찌민 인근 공장에서 단순 노동을 하며 두 달을 보냈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자는 것도 현지인과 똑같이 하려고 했다. 베트남으로 떠날 때 A4용지 다섯 장 분량 정도 되는 글을 써서 지인들에게 보냈다. 자신이 왜 떠나는지 설명하는 글이었다. 마치 출가를 결심한 사람의 글처럼 읽혔다.

“무아(無我). 나의 존재에 대한 자각이 없다. 내가 없기 때문에 이 경지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없을 것이다. 밥을 먹으면 먹는 것이고, 없어서 못 먹으면 못 먹는 것이고, 밥이 있는데 일부러 안 먹는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고기가 있으면 고기를 먹고 돼지죽이 있으면 돼지죽을 먹어도 상관이 없는 경지…. 나라는 존재가 없기에 남의 입장을 온전히 당사자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존재, 모든 것들에 대한 완벽한 동감과 완벽한 포용을 하는 존재로 변하는 것이다.”<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쓴 글>

20대 청년의 치기 어린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방황이 길어지고 깊어졌다. 학교로 돌아갈 생각과는 점점 멀어져 갔다. ‘해야 된다’ 혹은 ‘하면 안 된다’라는 틀은 벗어나고 싶었던 이 사람의 방황은 베트남 공장 생활 두 달에 이어 귀국 이후 목수 생활로 이어졌다. 손을 써서 하는 일을 좋아하고 잘한다는 생각에서 선택한 일이었다.

목수 일을 배우기 위해 몇 군데 목공소 문을 두드렸지만 과학고 나오고 서울대 다니는 청년을 환영하는 곳은 없었다. 몇 번 퇴짜를 맞은 끝에 경기도 시흥에 있는 한 목공소에 취직을 했다. 목공소 사장이 해병대 출신이라 해병대 후배를 뽑았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그곳에서 유치원 화단부터 시작해서 아이들 신발장, 조금 고급으로 가면 편백나무 침대 같은 것을 만들었다. 나름 독한 마음을 갖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목공소는 오래 다니지 않았다.

“목공 자체는 재미있었는데 내가 이걸 하고 있는 게 맞는 건가 하는 회의가 계속 저를 괴롭히더라구요. 내가 소질이 있는 이공계에서 뭔가를 발견해서 이바지할 수 있는 게 지금 하고 있는 일보다는 크지 않을까, 내가 유치원 화단 만드는 것보다는 더 좋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더라구요.”

목공소 생활은 두 달 정도에 그쳤다. 힘껏 궤도 밖으로 달려나가보려고 했던 것은 틀림없지만 궤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이 사람이 돌아올 곳 역시 정해져 있었다. 방황의 깊이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지만 방황의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제대 이후 베트남 공장 생활, 목공소 생활을 한 6개월 정도 했는데 정주행하던 사람이 옆길로 샌 시간, 잠시 가졌던 일탈의 시간 아니었을까요?

이 질문이 불쾌했을까, 단호한 표정으로 이렇게 답했다.

“저는 치열한 고민의 시간이었던 거 같아요.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이게 그 당시 제 고민의 핵심이었거든요. 내가 뭘 하면서 살아야 되는가, 뭘 해야 되는가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그런 시도들을 해봤던 건데 목공은 실제로 제가 굉장히 좋아했어요. 지금도 사실 나이 들면 목공을 꼭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목공이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목공소를 갔거든요.”

4. 창업으로 세상에 임팩트를 주자!

만 3년 만에 관악 캠퍼스로 다시 돌아왔다. 몇 년간 손에서 놓았던 물리 공부, 복수 전공 과목을 따라가기 위해 맹렬하게 공부를 했다. 과외 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학교 구내식당에서 천 원짜리 식사로 세 끼를 해결했다. 하루 식비 3000원 포함해서 한 달 10만원으로 살았다. 한 끼 1000원의 밥을 먹으면서 돈이 없어 밥을 굶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배고플 것에 대비해 밥을 리필해서 먹을 때면 자기도 모르게 독기가 올랐다.

그 무렵 홍콩 과기대와 조인트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창업 강의'를 들었다. 그 강의에서 ‘리’라는 이름의 홍콩 과기대 교수를 만났고 그 교수가 중국 심천에 세운 개인 연구단지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서울대 관악 캠퍼스보다 넓은 부지에 세워진 개인 연구 단지에 스타트업들이 들어서 있었다. 개인 돈으로 급여와 연구비를 주며 실패해도 좋으니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라도 하라며 후학들에게 실패가 전혀 두렵지 않은 공간을 만들어 준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보면서 ‘이런 게 임팩트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교수가 세계 최대 드론 업체의 지분을 가지고 있고 개인 자산이 3조원이에요. 그 돈으로 연구단지를 만들어서 운영하는 거였어요. 어떻게 하면 큰일을 할 수 있을까 방법론이 막연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창업을 하면 되겠구나, 공부 말고 창업을 해서 내가 3조원 정도의 부가 있으면 이런 정도의 임팩트를 만들어 낼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창업으로 눈을 돌리게 됐죠.”

물리학과 대학원에 진학해서 이름을 알 만한 학술지에 논문까지 발표했지만 보다 실용적인 일을 해서 세상에 ‘임팩트’를 주고 싶다는 마음이 바뀌지는 않았다. 두 군데 스타트업에서 6개월 정도 경험을 쌓은 끝에 지난해 2월 서울과학고와 서울대 1년 후배이자 친구인 두 명과 회사를 만들었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유통 마진을 없애서 생산자는 합리적인 가격에 소매 판매를 가능하게 해주고, 소비자는 평소보다 더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서비스를 지난해 9월부터 시작했다.

세 사람의 공동 창업자는 마케팅 경험도 없고 앱을 만들어본 적도 없고 이커머스(전자상거래) 경험을 해본 적도 없다. 그렇다고 손에 쥔 것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공동 창업자 세 명이 최초 자금 1000만원을 마련했고 처음 사무실은 공동 창업자 원룸이었다. 우리가 배우는 능력만큼은 이 세상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니 아는 것은 아는 대로 해결하고 모르는 것은 배워가면서 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다.

-앱을 만들고 구매, 판매 등 영업도 직접하고 홍보도 직접 하고, 이런 모든 것을 직접 한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저희 백그라운드가 앱 개발이랄지 인공지능(AI) 쪽으로 특화돼 있는 것은 아니에요. 사실 가방끈이 길지도 않고 박사 따신 분들도 많고 전문가도 많은데 저희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려면 또 다 하더라고요. 앱 개발도 저랑 박상우라는 공동창업자가 했는데, 상우는 앱 개발 경험이 전혀 없고 저는 개발 경력이 딱 두 달이었어요. 그래서 둘이 만들었는데 만들어지더라구요. '다 되는구나' 그런 정신으로 하고 있습니다.”

-창업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기본적으로 구성원들이 같은 비전으로 다 한마음 한뜻으로 달려가게 계속 신경을 쓰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거 같아요. 어떤 문제를 풀어야 되는데 그런 것들이야 하면 되니까요.

-하면 됩니까?

“네 (문제가 뭐가 됐든) 방법이야 있지 않을까요.”

-해결 방법이 있습니까?

“방법은 무조건 있으니까요.”

-정말 그래요?

“그럼요”

세 명의 공동창업자는 한 달에 100만원씩 받는 대신 직원들에게 최소 월 300만원, 최대 2억원의 급여를 주고 스톡옵션을 보장한다. 공동 창업자의 원룸에서 자본금 1000만원으로 시작한 사업은 이제 직원이 22명으로 늘었다. 135억원의 초기 투자를 받았고 서비스를 시작한 지 9개월 만에 앱 다운로드 건수가 300만 건에 육박한다. 월 거래액이 80억원을 넘어섰는데 그 성장 속도가 심상치 않다.

-객관적으로 현재 어떤 상태인가요?

“저희 내부적으로도 객관적으로 보려고 엄청 노력하는데 저희 판단으로는 초기 성장 곡선은 그 누구보다 빨랐던 거 같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정말 더 대중적인 서비스로 나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쇄신이 필요하다, 뭐 이런 내부적 상황입니다.”

-올 연말 거래 목표액이 4000억원이라고 한 자료를 봤는데 그것은 연간 거래액을 말하는 거겠지요?

“거기서 말한 4000억원은 월 4000억원이 맞을 겁니다.”

-월 4000억원이 가능할 거 같습니까.

“그거는 플레이하기 나름인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희가 지난해 12월에 폭발적으로 빵 튀었거든요. 11월 거래액이 1억원이었는데 12월 거래액이 11억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성장을 한번 경험을 해보니까 우리가 정말 좋은 서비스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성장할 수 있겠다 뭐 이런 희망을 갖고 있는 상태입니다.”

갈 길이 까마득히 남았고 사업이 안정 궤도에 오른 것도 아니다. 유저 몇백만 명, 월 거래액 몇천 억원 같은 야심 찬 수치는 곧 시장과 소비자에게 검증을 받을 것이다. 이들의 도전을 걸어서 달나라에 가겠다는 것만큼이나 무모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어쨌든 목표를 향해 몇 걸음을 뗐다는 사실이다.

5. 미친 듯이, 미친 듯이 일하는 이유

결국 돈을 벌고 싶은 것 아닐까. 남들보다 많은 돈, 남들이 버는 것의 10배, 100배쯤 벌고 싶은 게 아닐까.

-스타트업은 결국 돈을 왕창 벌자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거죠?

“뭐 돈도 왕창 벌면 좋긴 한데 그걸 넘어서는 어떤 더 큰 욕심도 있는 거 같아요. 전체 인류를 위한다는 그런 갈망, 욕심보다는 갈망이 있는 거 같아요. 예를 들면 구글처럼 모든 인류가 매일 사용하는 서비스를 만들자, 그러면 그것을 레버리지 삼아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 많거든요.”

아마존보다 더 큰 기업을 만들어서 빈곤이든 질병이든 인류 전체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자신들의 사업으로 기여하고 싶고, 자신들의 서비스를 사용하는 모든 인류에게 희망을 주고 싶단다. 자신들의 서비스를 지렛대로 삼아 생산부터 유통까지 자신들이 관여할 수 있게 되면 지구촌 식량 문제 같은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은 것은 그 꿈을 향해 달려가는 자세 때문이다.

-회사 칠판에 ‘EXIT은 없다’라고 써 놨다는데 그게 무슨 의밉니까.

“엑시트(EXIT)라는 말이 기업을 어느 정도 성장시켜서 다른 회사에 팔고 현금으로 보상을 받는 것을 말하는데 그런 EXIT를 염두에 두면 이걸 언제 팔아야 되지, 어떻게 팔지, 팔려면 무엇을 해야 되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그래서 이 서비스가 모든 사람이 매일 사용하는 서비스가 되는 거랑 결이 좀 안 맞겠다 싶어서 선택과 집중 차원에서 가지를 쳐낸 겁니다.”

인수합병(M&A) 같은 방법으로 돈 벌 생각은 없다는 이 사람에게 성공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세상에 임팩트를 주는 것"이라고 했다. ‘영향’ ‘충격’이란 뜻의 영어 단어 ‘임팩트’를 입에 달고 산다. 그 표현만으로는 이 사람 생각이 제대로 와 닿지 않았다. 롤 모델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에게 영감을 준 사람은 있다고 했다.

“일론 머스크가 인상적이었는데요, 지구 온난화 이런 거에 대해서 옛날부터 탄소 배출량을 줄여야 한다, 어쩐다 말들은 정말 많았는데 열렬한 활동가들은 정말 극소수고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피부로 와 닿지 않았던 이슈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사고 싶은 전기차를 만들어 버렸을 때의 임팩트. 그런 것들을 보면서 의중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구나, 실질적인 파워가 있어야 되는데 그게 비즈니스로 풀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해줬던 거 같아요.”

온라인에서 싸게 물건을 판매하고 구입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100원, 200원도 크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해외여행 가겠다는 댓글 보면서 이 서비스를 시작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새벽 3시까지 일하고 아침 10시 전후해서 출근한다. 잠을 너무 줄이면 업무 효율이 떨어져서 하루 6시간은 자려고 노력한다.

-창업을 한 친구를 봤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습니까.

“거의 맨땅에 헤딩하듯이 시작을 한 거잖아요. 그 분야가 자기 전공 분야라고 할 수도 없어서 되게 어려웠을 텐데 현직이가 미친 듯이 공부를 하더라구요.”<김홍준, 서울대 물리학과 동기>

-어느 정도로 노력을 했길래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고 표현을 하십니까.

“어떤 공부를 하면 대개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겠다고 예상을 하잖아요. 지금 하는 사업에 필요한 코딩 공부를 하려면 남들은 몇 년이 걸린다는데 현직이는 몇 달 만에 그걸 뗐다고 하더라구요.”<김홍준, 서울대 물리학과 동기>

말을 하면서 부사를 별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엄청’, ‘어마어마하게’ 신나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무런 잡념이 없고 자신의 28년 인생에서 최고의 성취감을 맛보고 있다는 말도 했다. 투표는 하느냐고 물었더니 한다고 했다. '이대남, 이대녀'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반응이 의외였다.

“이대남 이대녀가 어떤 건가요?”

-어떤 건지 모르세요?

“네네. 이대남이 뭐죠?

-이대녀는 뭔지 아세요?

“이대 다니는 여자인가요?”

-진짜 모르시네요.

“다들 아시는 거예요?”

뉴스를 안 본 지 오래됐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중3 때 거의 매일 밤을 새우며 물리 공부를 하고 침대에 누웠을 때 온몸의 세포가 녹아내리는 것 같다고 일기장에 썼는데 지난해 이후 그런 기분을 다시 느끼고 있다. 몇 번의 두려운 순간들을 넘어선 경험이 창업을 하면서 힘이 된다. 해병대 입대가 조금 두려웠지만 막상 가보니 괜찮았고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올라갈 때 두려웠지만 그 역시 가보니 괜찮았다. 창업 역시 그럴 거라고 믿는다.

-이현직에게 성공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이루면 성공이다'라는 그런 기준이 있습니까?

“어떤 성공의 도착점이 찍혀 있지는 않은 거 같아요. 더 큰 임팩트를 내면 당연히 좋겠지만 지금 저의 마음은 과정 자체에 있는 거 같아요. 저희 공동 창업자 3명이 창업할 때 주주 간 계약서를 썼거든요. 15년 이내에 회사 나가면 국물도 없다, 이런 내용을 문서화해서 작성했습니다. 자신의 인생 15년을 이 회사에 투자한다는 것은 그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으면 바보 같은 짓일 수 있거든요.”

창업자들끼리 맺었다는 도원결의가 얼마나 굳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한 맹세라는 것이 실패 앞에서 깨지기보다 성공 앞에서 흔들리는 일이 잦다는 것을 수많은 동업 사례들이 보여주고 있다. 아슬아슬한 시련과 작은 성취들이 쌓여가는 과정만 반복된다면 이들의 맹세는 하루하루 더 단단해질 것이나 이들의 믿음과 우정이 시험받을 순간은 앞으로 숱하게 많을 것이다. 부의 크기보다 꿈의 크기를 먼저 말하는 사람들의 관계라면 이야기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6. 미국이나 중국이 두렵지 않아요

내년에 미국 진출을 계획하고 있고 동남아 제조업 시장 진출도 염두에 두고 있다. 아직 국내 시장에서 검증이 된 것도 아니고 설사 국내에서 성공했다 하더라도 외국에서 성공하라는 보장은 더더욱 없다. 분명한 것은 이 사람과 이 사람 친구들이 자신들의 사업 범위를 한반도에 국한하지 않고 전 세계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경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넘는 거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 거네요.

“그런 거 같습니다.”

-현직 씨 동료들도 그런 생각을 하나요.

“그렇죠. 그렇죠.”

-그 세대들의 특징일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비슷한 성향 사람들만 만나서 편향돼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 대한 전반적인 통계 같은 것은 제가 잘 모릅니다. 어쨌든 제 주변에는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활동 무대가 대한민국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저희 회사 동료들은 그렇게 다들 생각하는 거 같습니다. 대학 동기들도 그런 거 같고요.”

이들의 경쟁자는 국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국이나 미국에 있는 비슷한 또래들, 스타트업 만들어 노력하는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강하다는 생각을 하는지 물었다.

“그 사람들이 더 특별히 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군에 있을 때 미국 해병대와 합동 훈련을 한 적이 있는데 장비가 정말 좋더라고요. 장비는 정말 부러웠는데 저 사람들의 정신 상태가 우리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한국 해병대가 정신 상태는 우월하지 않은가 생각했는데 그런 경험 때문인지 미국이라고 별거 있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왜 우리처럼 시도해보지 않았을까, 이렇게 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성과를 낼 수 있는데 이런 생각은 안 했습니까.

“그런 생각은 했는데 저희에게는 기쁜 순간이죠. 왜 다른 사람들은 안 해봤지, 우리가 하면 되겠다 그런 느낌이라서요.”

이 사람 세대의 장점은 무엇일까. 스타트업 분야에서 이른바 MZ(밀레니얼+Z)세대의 경쟁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세대 관점에서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기술에 대한 친화도 정도는 있을 거 같아요. 제가 만약에 지금 50대라면 현재의 가장 핫한 기술들에 대해서 친화도가 떨어질 거 같은데 저희는 상대적으로 친숙하다고 생각이 돼서 저희가 꿈꾸는 정보기술(IT) 기업의 방향성에는 적합할 거 같습니다.”

문제가 뭐든지 해결 방법이 있고 자기들은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 이 사람에게 자신의 위 세대들은 혹시 무능해 보이지 않을까.

“저희는 그런 마음이지만 뭐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흔치 않은 거 같고 그런 잣대로 모든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되는 거 같아요. 부모님 세대는 그분들 세대 나름의 덕목이 있을 거 같고 저는 그분들 존경합니다. 무능해 보이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자신들 세대가 다른 세대들에 비해 특별히 더 어려운 세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 세대는 각 세대마다 어려움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자신이 부양해야 할 가족이 없어 내 집 마련 같은 것에 별 관심이 없고 지금 사는 원룸에 만족한다고 했다. 살아온 과정이 예외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런 생각도 일반적인 청년과는 좀 달랐다.

7. 백일몽이라도 꿈을 꾸는 사람이 아름답다

이 시대 청년들은 늘 쪼들린다. 집 문제로 쪼들리고 취업난으로 쪼들리고 학비로 쪼들린다. 가슴 쫙 펴고 꿈을 가지라고 말하기 어렵다. 꿈을 말하면 요즘 같은 세상에서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말 듣기 십상이다. 당장 먹고살기 바쁘고 이제 평생 내 집 한 칸 갖는 것도 어려워진 세상에서 꿈을 꾸는 것 자체가 사치일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대세인 세상에서 꿈을 꾸는 청년을 만나 반가웠다. 비록 백일몽이라도 꿈을 꾸는 사람은 아름답다.

이 사람과 비슷한 또래를 만나 이 사람에게 무엇을 물어보면 좋을지 의견을 나누었다. 그 사람은 서울대 출신이니까, 자신감이 있으니까, 젊으니까, 실패해도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그런 모험과 다양한 시도들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했다. 부럽다고 말하며 이 사람 삶을 '갓생(God+生)'이라고 표현하는 청년도 있었다. 평균적인 20대라고 하기는 좀 어려운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대부분의 20대들이 과도한 입시 교육의 피해를 받은 것에 비하면 이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살려주고 발전시켜 주는 제도의 혜택을 받았다. 모든 과목을 다 잘해야 했다면 서울과학고에 가지 못했을 테고 서울대에 가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큰 꿈을 꾸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서울과학고 다닐 때 아버지가 항상 그러셨거든요. ‘네가 이렇게 받는 거다, 이렇게 받는 만큼 베풀 수 있어야 한다. 본인의 배부름에 안주하면 안 된다, 본인의 안위만이 전부가 돼서는 안 된다’”

이 사람 모교인 서울과학고의 교훈은 ‘세계 인류에 공헌하는 창의적 융합 인재의 양성’이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며 살았던 세대들에게 ‘세계 인류’에 공헌할 인재를 키우자는 목표는 상전벽해로 느껴진다. 교훈의 영향으로 전 세계 인류에게 기여하는 일을 하려고 했다면 그 역시 우스운 일이겠지만 이 사람이 어쨌든 우리 교육이 지향하는 큰 자장 안에 있었던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방황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처럼 꿈을 꾸는 시기도 짧을 수 있다. 그런들 어떠랴 싶다. 야망은 갸륵하고 기특하나 아무려면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 할까. 시련도 있고 실패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통해서 이 사람과 이 사람 친구들과 이 사람 세대가 만들어갈 내일이 우리들의 미래이자 인류의 미래다.

이제 서른도 안된 사람이 말하는 것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는 것은 아닌지, 한 청년의 야심에 현혹된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여러 번 물었다. 이 사람과 그 친구들이 말하는 몇 개의 숫자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거듭해서 물어봤다. 그럴지도 모르는데 속았다 한들 뭐가 대수일까 싶다. 기꺼이 이 사람을 믿기로 했다. 이 사람과 비슷한 꿈을 꾸고 있는 청년들을 기꺼이 믿기로 했다. 눈 크게 뜨고 살펴보지 않아서 찾지 못했을 뿐 찾자고 들면 이런 청년이 주변에 숱하게 많다는 것도 믿기로 했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윤춘호 | 에스비에스(SBS) 논설위원
1991년 SBS 기자로 입사해 정치부, 사회부, 국제부에서 주로 일했다. 지금은 논설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자신의 몸을 써서 일하는 사람들, 세상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견디며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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